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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해광업공단 광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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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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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수립 이전

1945년 8월15일 해방을 맞이하고 그 해 9월 7일 북위 38선 이남지역에 대하여 미국의 군정이 선포되었습니다. 미 군정청은 11월 6일 일제시의 모든 광업관계 법령은 그대로 유효하되 일본인 명의의 광업권과 그 재산은 군정청이 소유한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전체광산의 90%이상이나 되는 귀속광산의 관리를 위해 각 도에 도관재처를 설치하고 광산운영에 관련된 모든 권한을 위임하였으며 각 광산에 관리인을 임명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혼란하고 무질서한 사회상과 자금사정상 광산운영은 불가능한 상태로 소수의 대규모 광산을 제외한 모든 광산이 휴광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1946년 9월 20일 미군정은 행정권을 한국에 이양하였고, 1947년 2월 5일 민정 청으로 개칭되어 정부수립을 위한 준비작업이 진행되었습니다. 또한 이 때에 광업분야도 한국인에 의한 자치체제로 바뀌면서 광업전담의 광무부가 신설되었습니다. 군정 당시 석탄생산위원회를 구성하여 탄광개발계획을 수립하고 석탄생산을 위한 자금지원 등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생산은 미미하였고 일반광은 동 및 중석 등 몇 개의 광간만이 명맥을 유지할 정도로 가행되었습니다. 1947년 6월 장항제련소 가동 재개 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이유로 북한이 1948년 5월 남쪽으로의 송전을 단절함으로서 광산 활동은 마비상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정부수립 이후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고 1949년에 경제자립을 위한 5개년계획이 수립됩니다. 광업은 정부 조직 내 상공부 광무국에서 전담하게 되었으며, 광무국은 과거 도에서 관장하였던 귀속광산의 관리일체에 대하여 이관을 받고 덕대제도를 신설하여 광산개발을 도모하게 됩니다.

이 제도는 선임된 덕대인과 덕대(임대)계약을 체결하고 덕대개발권을 주어 광산을 개발토록 하는 것이었는데 1951년 11월 현재 121개 광산에 200여 광구가 허가되었습니다. 귀속광산은 국유화되었고 후에 민간인에게 불하를 하였습니다.
1950년 5월 4일자로 「대한석탄공사법」이 공포되고 대한석탄공사가 동년 11월에 설립되어 국민대중의 가정용 연료로서 무연탄을 생산 공급하게 됩니다. 대한석탄공사는 산하에 장성, 도계, 은성, 화순, 함백, 나전, 화성 등 8개 광업소를 두어 체계적인 개발을 추진하였고 우리나라 석탄산업개발에 선도적 역할을 담당하여 왔습니다. 대한석탄공사는 미군정 때 직영되던 각 탄광을 통합 운영하여 무연탄 생산량 중 80%를 점유하게 됩니다. 정부투자기관으로서 대한석탄공사는 무연탄의 수급조정에 주요 역할을 하였고, 여타 민영광산과 함께 무연탄이 국민연료로 자리매김하도록 기여함으로서 황폐화되었던 국토의 산림화에도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정부수립 후 유엔한국재건단(UNKRA)에서 1951년부터 7년간에 걸쳐 광업부문에 1천만불이 지윈되어 광산복구, 운반설비, 광산물 수출입 알선, 탐광장려 등 각종 사업이 추진되어 대한석탄공사의 장성 및 은성탄광과 강원 옥동 등 민영탄광 그리고 충주철광과 동양활석광산의 개발이 본격화되었으며, 1954년 대전에 운크라광물시험소도 설립되어 광산개발에 기여하였습니다 또한 1958년에는 한·미 정부간협정에 의해 KOMEP사업이 추진되어 기재공급 대여와 탐광굴진 보조가 시작되기에 이릅니다.
대한중석광산 보호를 위해 1951년에는 미군 병력이 상동광산에 배치되었으며, 광산 복구작업을 통해 정상조업이 이루어지면서 중석정광이 생산되었습니다. 1952년 3월에 한·미중석협정에 의해 1954년 9월까지 15,000톤을 생산하여 전량 미국으로 수출되었고, 중석광은 이후 줄곧 유망수출 광산뭍로서 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
석탄산업 육성을 위한 원조사업으로 미국국제개발기구(USAID)는 1955년에서 1969년까지 석공의 장성탄광 수갱건설에 150만달러를 장기·저리 지원하면서 무상원조 대행기관인 P.M.C로 하여금 10여명의 전문기술자를 파견 주재하여 수갱을 1968년에 준공시키게 됩니다.

이에 앞서 1962년 및 1963년에 강원탄광의 1, 2 수갱이 국내기술에 의해 건설된 바 있습니다. 장성수갱 준공 이후 국내 여러 탄광에 우리의 기술로 수갱이 잇따라 건설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석탄광 심부개발이 가능해지고 석탄산업이 크게 발전하게 됩니다.
한국 광업법은 6.25 동란중인 1951년 12월에 부산에서 제정·공포되었으며, 동 법에 의해 단위 광구제가 도입되었습니다. 국유재산법에 의해 국유화되었던 귀속 광산의 광업권은 1958년에서 1962년 사이에 대부분이 민간에게 불하되었습니다.

1951년 광업법 공포 시 「금에 관한 임시조치법」이 동시에 공포되었는데 동 법은 금의 생산 판매를 자유화시켰고 1954년의 「산금집중조성요령」에 의해 산금을 한국은행에 매각케 하고 대금의 외환결재 구상무역 허가 등 각종 혜택을 주어 산금장려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외화낭비와 밀수조장의 부작용이 따라 정책을 바꿔 원화로 지급 시행하다가 1973년 동 법령을 폐지하게 됩니다.

무연탄이 국민 가정연료로서 굳혀짐에 따라 그 수요가 급속도로 신장되게 되었고 이의 원활한 공급을 위해 1955년에 석탄산업합리화 기본계획이 수립되었으며, 5개년계획의 마지막 연도인 1959년 석탄 생산량을 570만톤으로 책정하였고 1956년 영암선이 개통되어 삼척탄전 생산량의 내륙수송이 가능케 되었습니다. 이후 1961년 5.16군사정변이 일어나고 경제개발개발 5개년계획의 일환으로 태백산지구 지하자원조사단이 편성되어 지질조사와 탐광조사가 체계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한편, 일반광 개발활성화를 위해 1961년 9월에 「한국광업제련공사법」이 제정되어 금, 은, 동, 연, 아연광 등 비철금속광산의 생산물을 장항제련소에 매각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1961년 12월 「석탄개발임시조치법」이 발효되어 탄좌제도에 의한 종합개발이 가능하도록 하였습니다. 동 법으로 미개발 탄전 또는 군소 탄광들을 대단위화 하여 삼척·동원·문경 등의 지구에 9개 탄좌를 설정하고, 송변전·도로·철도 등 관련 사업을 추진하는 등 석탄개발의 적극성을 띠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1985년 삼척·동원 탄좌는 80만톤 이상의 석탄을 생산하기에 이르렀고, 전체 석탄 생산량이 1960년대의 535만톤에서 1985년에 2,250만톤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1962년 6월에 「광업개발조성법」을 제정하게 되고, 1963년 3월 「광업조성령」을 전면 개정하여 민영광산 육성에 박차를 가하게 하였으나 융자업무는 상공부와 산업은행, 시추사업은 국립지질조사소와 대한석탄공사, 기자재 대여사업은 국립지질조사소와 대한철광개발주식회사, 탐광굴진사업은 국립지질조사소가 담당하는 등 기능면에서 여러 기관에 분산되어 비효율적이었습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정부는 1964년 4월 29일 상공부고시에 의해 석탄광은 대한석탄공사가, 일반광은 대한철광개발주식회사에서 각각 조성업무를 분담하도록 하였으나 이러한 조정에도 불구하고 조성업무의 이원화에 따른 불편은 해소되지 못하였습니다.

다시 정부는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광업조성 업무를 강력히 추진할 전담기구의 설립을 추진하여 1967년 3월 30일 「한국광물자원공사법」을 공포하였고, 같은 해6월 5일에 한국광물자원공사가 설립됨으로서 한국광업이 획기적으로 발전할 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기간(1962~1966년)중의 광업생산이 국민총생산에 차지하는 비중이 1.7~l.8%로서 1960년과 1961년에 있어서의 1.4%보다 크게 증가하게 됩니다.
1960년대 이전의 광업은 고용효과가 커서 국내 산업의 큰 비중을 차지하였으나, 1970년대 이후에는 국내 경제 규모 및 구조 변화로 인해 광업은 상대적으로 약세 산업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이로써, 국민총생산에 대한 광업 비중은 1965년 2.0%를 고비로 점차 하향 추세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1985년에 국민총생산에 대한 광업 비중이 1.5%로서 다시 약간 상승된 이유는 1980년대 이후 석탄 및 석재 산업이 활성화되었기 때문입니다.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국내 광산개발에 대한 높은 생산비와 수입 광산물의 낮은 가격으로 인해 대부분의 국내 광산들은 휴광 및 폐광되기에 이르렀고, 2000년대에 들어와서 에너지 및 광물자원가격의 상승으로 국내 광산의 개발보다는 해외자원개발을 적극 추진하는 추세가 되었습니다. 이로써 산업 성장에 따른 자원 수요는 확대되었으나 국내 생산의 한계성으로 인해 자급도는 점차 낮아질 전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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