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이후
개항 이후
쇄국정치를 펴던 조선이 1876년 서양세력에 문호를 개방하면서 광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대두되었습니다. 이에 따른 광업정책이 수립되는 한편, 외국 열강의 세력이 침투하게 됨으로써 조선시대의 광업계는 혁신적인 변화를 맞게 되었습니다.
1880년대 조선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열강들은 조선의 경제적 이권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는데, 이들은 최혜국조약을 내세워 대부분 일정지역의 광산 채굴권을 획득한 뒤 주로 금광개발에 주력하였습니다. 조선에 대한 열강의 이권 침탈 과정은 다음과 같은 단계적 시기를 거쳤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 당시에 각 열강별로 차지한 대표적 광산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01.미국은 운산 금광
- 02.독일은 당현금광·선천광산
- 03.영국은 은산광산·수안광산·영평 사금광·구성광산·초산광산
- 04.일본은 직산금광·창원금광
- 05.러시아는 경원광산·종성광산
- 06.프랑스는 창성광산
- 07.이탈리아는 후창광산을 차지하였습니다.
이들 중 특히 운산금광은 소위 ‘노다지’ 금광으로 알려져 막대한 수익을 올렸으며 이 광산에 대한 계약문에 의하면 자본의 25%만이 조선정부의 소유로 된 미국 자본가와의 공동 경영 형태였기 때문에 이후 다른 국가들이 이권계약을 맺을 때마다 이를 기초로 삼아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문호개방 이후 외국인에 의한 광산 탐사와 채광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외국인의 무단채굴을 금하는 방책을 마련하고 번창하는 광업업무를 관장하기 위해 1887년에 광무국이 설치되었습니다. 그리고 행정뿐 아니라 자금 및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외국인 광산전문가를 초빙하기도 하여 1888년 미국에서 광산전문가를 처음으로 초빙하였고, 이듬해에는 미국인 광산전문가 5인을 초빙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활발한 광업정책으로 인해 전국의 개광 광산수가 늘어나게 되어 광무국의 관리 능력이 한계에 달하자, 1894년에 농상아문을 신설하여 광무를 담당하도록 하였습니다. 그 후 1895년 3월 전반적인 관제개혁을 실시할 때는 농상아문과 공무아문을 통합하여 농상공부로 개편하여 광산의 조사, 관민업에 속하는 광산의 사항, 지질 및 분석에 관한 사항 등 광산 업무를 총괄 담당하게 됩니다.
농상공부에서는 1895년 5월 19일 47조로 된 「사금개채조례」를 반포하여 어느 정도 광업 행정의 체계를 이루게 되었는데, 이 법규는 종래의 무질서한 사금 채취에서 오는 폐단을 수습하고 광세를 징수하여 국가 재정에 연결시켰다는 점에서 광업정책의 진일보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금광업을 국가 산업의 독립된 분야로 발전시키려는 적극적 광업정책이라기보다는 광업을 농업에 저촉되지 않는 한도 내의 부차적인 산업으로 규정하려는 데에 그치고 맙니다.
1895년 이후 농상공부에는 일본인 광산기사가 초빙되어 일본의 세력이 커지게 되고, 열강의 광산이권 침탈이 적극화되자 이를 제지할 방침으로 정부는 전국의 광산 중 유망한 큰 광산들을 농상공부 관할에서 궁내부로 이속시켰습니다. 1898년 1월에는 국내 철도와 광산의 외국인 합동을 허가치 않는 방침을 공포하고, 1898년 6월에는 주요 광산을 궁내부 소유로 결정하는 조치를 내리게 되어 43개소 광산이 황실 직영 하에서 운영하게 됩니다. 1899년 2월에는 평안·함경·황해도의 농상공부 소관 광산을 다시 궁내부로 이속하였고, 궁내부 광산은 외국인에게 채광을 불허한다는 조항을 명시하였습니다. 1901년 6월에는 종래 농상공부 소속이던 경기도 양성, 충남의 천안·전의, 충북의 음성, 황해도의 배천, 평남의 순안, 평북의 창성 등 금광산과 강원도 철원의 철광산이 궁내부 소속으로 추가되어 51개 광산이 궁내부 직할에 속하게 됩니다.
1905년 일본에 의해 통감부가 설치되면서부터는 한국 광산 행정에 일본인 광산 고문들의 간섭이 심해졌습니다. 일본은 한국정부로 하여금 새로이 궁내부 소관 광산규칙을 마련케 하여, 1906년 6월 말에 「광업법」을 공포하고, 1906년 9 월에는 「제실광산규정」을 폐지함으로써, 궁내부 광산도 자유롭게 외국인의 이권 획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기초를 만들어 놓게 됩니다. 그 뒤 1906년 10월에는 「궁내부소속 광산건에 관한 규정」이 발표되어 궁내부 소속 광산은 26개소로 감소되었고, 더욱이 반 이상은 이미 외국인에게 특허된 광산이었습니다. 그 뒤 이 26개소 궁내부 소속 광산도 1907년 8월에는 완전히 폐지돼 버리고 맙니다.



